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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생각의 딴지

새해 계획 꼭 세우라고?

새해 인사를 나두던 친구가 묻는다.

"그래, 새해 계획이 뭐야?"

복 많이 받으라는 얘기에 바로 이어지는 새해 인사다. 친구도 무심코 물었겠지. 습관적으로.

"없어."

진짜 없다. 안 세웠다. 그럴 시간도, 맘도 없었다. 꼭 계획을 세워야 하나? 새해 계획이 이루어진 적이 있나? 생각해 보니 언제부턴가 새해 계획을 안세우기 시작했다. 어렴풋한 기억에 살짝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남들은 잘도 세우는 거 같다. 그게 정상이라고? 글쎄.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생각의 딴지가 아닐 수 없다.

변함 없는 신년계획

영화 '기생충'(출처:Daum 포토갤러리)

“야. 그래서 계획이 뭐야?”

영화 〈기생충〉에서 아내가 누워있는 백수 남편의 엉덩이를 툭툭 차며 던지는 말이다. 그런데 가장인 주인공은 느긋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냥 게을러터지기만 하다. 축축 쳐져서는 하릴 없이 무기력하기만 하다. 빈둥빈둥. 이런 사람을 보면 백이면 백 모두 한심하기 그지 없는 인생으로 치부한다. 물론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는 대책없는 무계획자가 아니라, 할 일을 단지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검색어 '무계획'으로 이리저리 써칭을 해봤다. 그러다 한 권의 책이 딱 눈에 들어왔다. 카르린 파시히/사샤 로보의 '무계획의 철학' (미래엔).

저자는 책에서 '조직화나 계획에 서툰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을 LOBO(Lifestyle Of Bad Organization)라고 부른다. 일을 계획성 있게 끝내지 못하는 사람, 계획이 없는 이 LOBO들은 무대책의 게으름뱅이가 아니라, “다만 일을 지연시킬 뿐”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지연하다, 미루다’의 어원이 ‘내일을 위해 남겨두다’라는 라틴어에서 기원했음도 강조한다.

"계획성 없이 일을 미루고 지연시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모두 미루는 본성을 타고 났다. 이 본성을 살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게으른 것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띠용~! 저자는 한마디로 본성을 바꾸면서까지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단정한다. 계획 없어도 얼마든지 괜찮게 살아갈 수 있다는 아주 신선한 얘기!

“미루는 습관이 있는 사람에게 주간계획표를 써보라고 권하는 것은 장기 우울증 환자에게 명랑하게 살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심리학자 조셉 페라리 교수(시카고 드폴대학)도 저자의 썰에 묵직한 시각을 던진다. 계획성 없이 사는 게 우리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는 얘기다.

허나 우리는 이 미루는 본성을 애써 부정하고 고치려고만 했다. 어릴 적부터 주전자 뚜껑으로 생활계획표를 짜는 부산을 떨며 그리도 스스로를 개조하려 애썼다. 힘들게 이 못된 본성을 바꿔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진리처럼 여겼다.

그런데 그렇게 안 살아도 된다고? 진짜일까? 이렇게 소심한 나 같은 이를 위해 저자는 꽤 확실한 사례를 소개한다. 위인 수준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았다고 말한다.

그 좋은 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다. 원래 모나리자의 완성은 시작후 1년이면 넉넉히 완성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이래저래 지연되고 미뤄지다 16년이 지난 1519년, 그가 죽기 직전에 겨우 완성되었다. 만약 원래 계획대로 1년 안에 모나리자가 완성됐다면, 과연 그 오묘하고 신비스런 미소를 우리가 감상할 수 있을까?

노련하게 미루라

저자는 무계획으로, 미루는 본성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비결로 ‘노련하게 미루라’고 말한다. 중요한 게 ‘노련함’ 이다. 노련함이 있으면 미루는 습관이 심하더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적당한 일의 분량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좋은 지연행동과 나쁜 지연행동'의 저자 폴 그레이엄이 말처럼 이것은 ‘올바르게 미루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연행동에 관한 대부분의 책은 치료 방법을 다룬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지연행동은 치료가 불가능하다. 맡은 업무가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이 딴청을 피울 다른 일거리는 무수히 많기 때문에 본래의 업무는 처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기 일쑤다. 그러므로 미루는 습관을 없애는 방법이 아니라, 올바르게 미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책을 쭉 읽어 보니 무계획의 핵심은 자신에게 관대해 지는 것에 있었다. 치밀하게, 계획성 있게 딱딱 일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학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되려 친절하게 대하라고 한다. 자신을 비난하면서 일을 미루면(어차피 미룰 일), 그 불쾌감이 훨씬 더 커지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첫 째, 미리 지연행동을 연습해 둘 것: 예습은 노련한 미루기에도 유익. 최고의 과제가 잘 풀리지 않는 큰 위기를 만났을 때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둘 째, 늦잠 자기: 책장에 이미 꽂혀 있거나 서점에 깔린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들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수면 시간 축소나 분할 기술과 비법을 익히라고 겁박한다. 그러나 노련하게 미루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은 침대에서 (고맙게도) 빈둥대거나 늦잠 자는 일이 심리적으로 큰 위안이 되기 때문에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재빠르게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 된다고 말한다.

셋 째(기타), 그냥 놔두기, 딴청피우기, 생산성 향상 어쩌구 조언하는 블로그 등 멀리하기


계획 없어도 괜찮아

저자는 친절하게도, 여전히 무계획을 불안하게 여기는 이들을 위한 안심 글을 잘 써 놨다. 무계획으로 세상에 꽤 걸출한 것을 남긴 이들이다.

리누스 토발즈는 컴퓨터 운영체제 ‘리눅스’를 개발하느라 전산학과를 졸업하는 데 8년이나 걸렸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은 독서 때문에 어머니가 시킨 농장 일을 게을리했다. 독일의 낭만시대 음악가 로베트르 슈만은 전공인 법학공부는 안하고 디립다 피아노만 쳤다. 아까 얘기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궁정 화가였지만 맡은 업무를 제때 끝내지 못했다. 기하학에 확 꽂혀서.

책을 보니까, 레전드 급의 대가들이 이뤄낸 걸작들의 상당수가 계획된 제 때 나온 것들이 아니더라. 인간의 본성인 게으름과 마냥 미루기, 그리고 딴청피우기 등의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탄생했다. 명확한 목표와 치밀한 계획과 열정적인 실행만이 전설적인 업적을 이루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계획 없이도 얼마든지 대작이 나올 수 있다는 거!

무계획의 계획

올해는 계획표 없이 LOBO로 살아볼거다. (수년 전부터 그래왔지만^^). 작심하고 안심(!)하고 계획 없이 헐렁하게 살아봐야지. 혹시 알어? 나도 걸작품 하나 세상에 낼른지.

대신 노련하게 미루자. 미루는 건 내일 할 일을 남겨두는 것이라는게 그 어원이라 하지 않았나.
늦잠도 자고, 딴청도 피고 전혀 새로운 것에 필도 꽂혀 가면서, 새해를 널널하게 살아보자.

그리고 내년 이맘 쯤 그 결과를 한 번 따져 보자.
햐, 이거 재밌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