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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역사

여운형기념관에서 빡치다

설 하루 전 날.
역사에 심취해 계신 아버지께서 '몽양 여운형'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달 21일에 방영된 KBS1의 '역사저널 그날'을 보셨나?'

가까운 양평에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경기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 66)이 있다고 했더니 무척 고무되신 아버지.

"그래? 거기 한 번 가보고 싶은데..."

경기도 하남에서 양평까지는 가까운 거리. 20여 분 만에 도착했지요.

몽양은 교육을 위해 '광명학교'를 세웠다.

관람객은 우리 일행 뿐. 7년 만의 재방문. 아버지는 기분이 'up' 되신 상태셨습니다.

몽양 선생이 생전에 쓰셨던 책상.

기념관 안내직원과 담소를 나누시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관람 스타트.

이윽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열공 모드에 들어가셨어요. 꼼꼼이 읽고 수첩에 적으시고...^^

몽양은 청소년 시절, 기독교인이 되었다.
몽양 선생은 부친상을 마치자 마자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기독교 사상을 실천한 것이다.
몽양이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을 때,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금메달 시상식에서 처음으로 일장기를 지웠다. 그 직후 몽양은 신문사를 폐간했다.

몽양의 고향은 양평이었습니다. 어릴 때 체력이 좋고 효심도 좋아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 단숨에 서울까지 달려 약을 지어 왔다는 일화가 적혀 있었어요.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조명했듯이, 몽양 여운형은 해방전후,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객이었습니다. 그 때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여러차례 실시했는데, 여운형이 이승만, 김구, 박헌영을 제치고 1위에 랭크되곤 했지요.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을 드나들 정도로 국제적 감각이 뛰서났고 명 연설가였으며 앞을 내다 볼 줄 아는 혜안의 정치가였다고 합니다. 그걸 일제가 잘 알고 있었지요.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패망 발표 5시간 전 조선총독부는 몽양을 비밀리에 불러 일제의 안전과 향후 치안을 상의했을 정도였습니다.

강골 몸짱이었던 몽양. 직접 철봉운동의 교본서에 출연하기도 했다.

특히 몽양은 젊은 층에 인기가 많아 당시 주례 섭외 1순위였다고 하네요.

그 당시 청년들은 여운형 선생과의 인증샷을 무지 찍고 싶었겠습니다. 그래선지 기념관 중앙엔 몽양과의 기념사진관이 있었어요. 몽양의 여러 옛 사진들에 나의 모습을 넣어 출력하는 방식입니다. 은근 재밌더군요. 원근과 위치에 신경을 쓰면 그럴듯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기념관을 주욱~ 훑어봤는데도 예전에 봤던 몽양의 재킷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극우파 부역자들에 의한 13번째 테러로 선혈이 묻어있던 흰색 자켓이 전시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 알아보니 기념관이 기념사업회에서 양평군으로 넘어간 뒤 자켓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그것 뿐이 아니었어요. 몽양의 장례식 당시 쓰인 만장(장례의 슬픔을 담은 글이 적힌 깃발)과 선생의 데스마스크도 보이지 않았어요. 당시 양평군수는 우편향 보수정당 소속의 인물이었지요.

'아.. 이런...'

느낌이 팍 왔습니다. 여전한 이념적 잣대. 아무리 보수정당 인간이라해도 역사의 자취에 손을 대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

몽양이 서거 당시 입고 있었던 재킷. 기념관에서 치워져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이미지 출처: 블로그 발효나라)
기념관에서 사라진 몽양의 서거 당시 제작된 데스마스크. 지금은 행방도 알 수가 없다. (이미지 출처: 블로그 발효나라)

"...유물에 손을 대면 되나."

실향민 출신으로 올곧이 보수당을 지지해온 아버지께서도 불편한 심기를 보이셨습니다. 군수란 자는 총선에도 나올거라더군요. 보수 표심을 잡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을 것 같은데...

"나눠지면 쓰러지고 합치면 반드시 일어선다."

여운형에 대한 공산주의자, 좌빨에 대한 인식은 그가 세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건준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광복이후 좌우 진영으로 갈라진 조국의 건국을 그토록 염원했던 여운형은 양쪽 진영으로부터 많은 오해와 견제를 받았던 게 사실입니다. 조국이 갈리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 재건되기를 염원했기에 양 진영에 손을 뻗었던 그였고 건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극우작당들에 의해 테러를 당해 건준은 스러져 버렸고 양진영이 하나 된 건국 준비는 종식되고 말았지요.

"나눠지면 쓰러지고 합치면 반드시 일어선다." (分則倒合必立) 여운형 선생이 1944년 새해를 맞으며 직접 쓴 친필 휘호. 임박한 광복을 예견하고 민족의 단결을 강조하고자 쓴 글이다.

답답한 마음에 기념관 밖에 위치한 몽양의 생가터에 올랐습니다. 가족사진, 면도하시는 사진에 조금 기분은 풀렸지만 여전히 역사를 이념에 맞게 제단하려는 속물들의 장난질에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가.
다복한 몽양의 일가족.
몽양의 면도 컷.

몽양에게 총구를 당긴 작자들이나 그의 흔적을 은폐시키는 인간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 여전히 어설픈 이념적 잣대로 역사를 난도질하는 비겁자들...

모처럼 아버지와 함께한 나들이었는데 여전한 이념의 장난질에 기분이 상해 버렸습니다. 언제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민족의 병이 사라질까...

고향 양평에 내려온 몽양 여운형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