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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아재 '셋' 제주 여행

(!) 새해.

연말이 되고 새해가 되면서 좋았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중 단연 으뜸은 30년 지기 친구 둘과 1박 제주 여행을 획 다녀온 거. 곧 쉰을 내다보는 중년 아재 셋이 제주 여행을 위해 쉬 뭉치다니! 그래서 친구 아내에게 톡을 보냈다. (가장 어려울 것으로 여겼던 그 친구는 아내의 허락이 필요하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아내들 덕에 아재 셋의 제주행은 무난히 성사되었다. 심지어 나의 아내님은 모처럼 가는 제주여행인데 최소 2박은 하고 와야지 않느냐며 일정을 늘리라고 했다. "역시 우리 아내 멋지지 않냐?" 자랑했더니, 친구 왈.

"그 말을 믿냐? 진짜 2박 하면 나중에 한 소리 들어..."

그런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아내는 진심에서 한 말이 틀림없는데...

완전 파릇파릇할 때 만난 친구들이다. 한 명은 목회자고 한 명은 전자장비 회사 영업이사다. 입시, 취업, 결혼, 출산, 이직, 퇴직 등 애송이 시절부터 가장이 될 때까지 참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마흔 후반의 아재들이 그렇듯 드믄드믄 연락을 하며 지내다 목사인 친구가 제주도 가자고 카톡을 보내왔다. 아니 거의 졸랐다. 바람 쐬고 싶다고. 당근 Me too 지!

첫날

12월 16일 월요일 아침,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지하철 승객들 표정이 회색빛이다. 아침부터 피곤에 절어 있는 안색. 좀 미안하지만 살짝 기분은 더 업.

"할 일이 좀 많아서. 노트북이랑 좀 들고 왔어."

바쁜 회사일에 투잡으로 스터디 카페까지 운영하는 친구는 이때부터 틈틈이 일을 했다. 그래도 제주로 향하는 우리는 즐겁기만 했다. 사십 대 후반의 아재 친구 셋이 평일에 제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 제주 여행의 콘셉트는 무조건 잘 먹고 잘 쉬는 거야!"

단순 명료. 웬만한 제주의 명소는 다 가봤으니 꼭 가야 하는 곳도 없었다. 그냥 제주에서 유유자적으로 맛집서 식사하며 보내는 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절친들. (왼쪽부터) 진스, 환스, 그리고 나(돈스).

"자, 첫 밥을 먹어야지?"

가볍게 먹기 위해 국숫집을 찾았다. 자자손손국수회관(제주시 삼성로 41)이 가까운 거리에. "콜" 회관답게 꽤 크네! 차 대기도 쉽고 값도 저렴해서 아침 때우기엔 그만이었다. 국물 후루룩 들이켜기가 무섭게 차에 올라 바다로 go go. 평소 제주도 타령을 많이 했더니만 친구들이 운전을 맡긴다.

"돈스가 가이드다~"

왠지 느껴지는 사명감. '니들을 뿅 가게 만들 최애 명소에 데려다 주마.' 그 마음으로 협재해변에 도착했다. (원래는 애월읍 카페촌으로 가려했는데 그 진입로를 놓침. (ㅡㅡ;)

"역시 돈스가 감각이 있네~"

이제 스무 살 초반 돼 보이는 젊은이들처럼 마구 폼 잡고 사진을 찍었다. 다행히 아재들은 최신 폰을 장만해 뒀다. 갤럭시 S10 5G와 아이폰 11. 근데 비교해 보니... 인덕션 폰이라는 아이폰 11의 사진빨은 장난이 아닌! 아웃 포커싱이 코앞 거리가 아니어도 중거리까지 된다! 화각이며 색감이 훨 낫네?! S10 5G로 만족했던 내가 인덕션폰에 한 방 먹었다. 사진 크기도 바로 인화할 만한 수준이라 무거운 DSLR 갖고 찍는 것 보다 훨 낫겠더라.

아이폰 11은 아웃포커싱 효과가 중거리에서도 명확히 나타났다.
요건 갤럭시 S10 5G로 찍은 사진.

카메라용으로 아이폰 11을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면 말 다한 거 아닌가. 목사 친구의 확인사살 한마디.

"야, 사진은 환스 아이폰으로만 찍자."

바다를 보니 제주가 이제야 실감 난다는 친구들.

"그래? 바다를 좀 더 제대로 뵈주지."

협재에서 콜라 한 잔 하고 다시 동쪽 아래로 달린다. 이번엔 송악산(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산2)이다. 제주 서쪽의 성산일출봉에 맞먹는다고 생각하는 단골 장소다. 둘레길에 가까워 성산일출봉 등반에 비해 식은 죽 먹기다. 마라도 건너 남해의 탁 트인 풍경이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마구마구 때려 줄 곳.

송악산 오르막길에서 본 풍경. 바다 건너 산방산(왼쪽)과 형제섬(오른쪽)이 보인다.

고맙게도 날씨가 화창했다. 봄 날씨다. 바람이 과하게 세찼지만, 온몸의 먼지를 화악 털어주는 기분이었다. 짙은 푸른색의 바다. 한 걸음 한 걸음 둘레길을 걸을 때마다 바다의 모양이 다르다.

"야... 진짜 죽이네. 성산보다 훨씬 낫다야."

게다가 한적하기까지 하니 이건 뭐 제대로 바다 바람 쐬기. 친구가 욕심이 났는지, 내친김에 마라도까지 가보자고 한다.

"워워.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불면 배가 안 떠. 그리고 너무 시간을 많이 날린다. 우리는 동선을 짧게 해서 재빠르게 이동하며 구경해야 한다니깐."

연초에 나 홀로 갔던 마라도는 가볼 만한 곳이었다. 짜장면도 뭍에서 먹는 것과 달리 특이했고. (근데 맛은 우리 동네 짜장이 더 낫더라) 그러나 우리는 1박 여행 중임을 명심해야 했다. 최대한 효율적인 여행!

바다에 취하고 바람에 날리다 보니 다시 배 고파지기 시작. 이번엔 무얼 잘 먹어볼꼬?

"갈치 때리자!"

약간의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내 원대로 갈치로 결정났다. 연초에 홀로 먹었던 갈치(3만 원)는 맛난 양념이 갈치에 충분히 배 있지 않아 아쉬웠다. 이번엔 제대로 먹어야 하는데... 이사 친구가 추천한 "괜찮은" 집으로 향했다.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형제도식당(본점: 서귀포시 일주서로 915). 꽤 깔끔하고 모던한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주차장 담장 옆이 귤 과수원이라 노란 귤들을 보고 만져(?)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내부도 깔끔 세련미 뿜 뿜. 바로 갈치 중(中)자를 시켰다. 6만5000원이면 꽤 양호한 편. 중국인들도 꽤 왔네. 사장님이 애써가며 갈치조림을 설명한다. 완전 기대. 오늘 제대로 갈치를 먹는 건가.

긴~ 갈치가 원래 모양 그대로 요리돼 나온다. 잘려서 뒤섞이지 않고...(먹기 전에 찍어둘 걸...)

맛집이었다. 진짜 맛나게 흡입했다. 갈치가 6조각 밖에 안나온게 아쉬웠을 정도로 제대로 갈치조림을 즐겼다. 무도 맛났고 전복 등 곁들여진 해물도 일품이었다. 수저로 국물을 떠먹었을 정도니까. 다음엔 대(大)자를 시켜야겠다. (으. 또 먹고 싶네)

"이번엔 근사한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해야지~"

이미 바다에 취해버린 아재들을 위해 역시바 근거리의 바다 뷰 카페를 물색, 중문관광단지를 지나 카페 바다다(서귀포시 대포동 2181-1)에 도착했다. 진짜 바로 앞이 바다였다. 작은 항구의 바다.

카페 바다다. 제주어로 바다가 '바당'임을 알게 된 곳

요트도 있고 보트도 있어서 변성기 청소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스피드를 즐기고 있더라. 탁 트인 바다를 한 번 더 기대하긴 했는데, 막상 스멀스멀 놀이 지는 항구의 풍경을 보니 운치가 있었다. 묵직한 머그컵의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바다 노을을 응시한다.

"아, 예. 부장님 제가 견적서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네네. 감사합니다..."

근속 20년을 자랑하는 친구 환스는 일이 계속되었다. 자기 머리 위로 바다 노을이 깔리고 있는데, 노트북만 쳐다보고 있다니. 막을 수도 없고...

"너 자꾸 일만 하면 네 아내한테 이른다~!"

어둑해진 카페에서 친구의 눈가 주름은 왜 또 그리 선명해 뵈는지...

입에 커피가 들어가니 여유 있는 얘기들이 두런두런 나오기 시작했다. 회사 얘기, 자식 얘기, 전에 함께 다니던 교회 얘기... 셋다 예수쟁이라 교회 얘기는 빠질 수가 없다. 스무 살 무렵에도 그랬다. 우리 집 옥상에서 삼겹살 궈 먹을 때도. 연애와 함께 단골 주제.

커피를 비울쯤 벌써 어둠이 내렸다. '안 돼~~~' 시간에 가속도가 붙었다!

밤에 들를 곳은 이미 두 곳으로 정한 상태. 이중섭 거리와 올레시장. 숙소에 짐을 풀고 지척 거리의 이중섭 거리로 향했다. 대학로나 홍대 비슷한 문화의 길이다. 한가하니 좋았다. 이중섭미술관(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중섭로 27-3)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거리를 천천히 걷는 것도 묘미가 있더라.

팬시점에 볼 것도 많았고 그 건너편 벤치에서의 사진 촬영도 기분 좋게 하는 멋거리였다. 특히 팬시 소품점 바이올레(서귀포시 이중섭로 2 1층)의 걸어 놓은 액자에 눈길이 많이 갔다. 어쩌면 그리 주옥같은 쩌는 문장들을 휘갈겨 놓았을까. 보는 내내 히죽대고 끄덕이며 힐링을 했다.

팬시점에서 두 친구들은 딸들의 선물을 챙겼다. 난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들들 한테 건넬 선물은 보이지 않는데... 근데 딸이 있으면 손이 갈 물건들이 많은가 보다. 일하기 바쁜 친구는 그 와중에도 고3이 되는 딸내미와 전화 애정행각을 가졌다. 저러니 선물을 안 사다 줄 수가 있나. '확실히 딸이 있어야 해. 딸이...'

다시 알람시계가 요동쳤다. 배꼽 알람. 일정 변경을 알리는 확고한 사인.

"얘들아. 올레시장 갈 시간이다~"

저녁 메뉴는 회다! 흑돼지와의 경쟁에서 회가 승. 제주의 럭셔리 재래시장도 구경할 겸 서귀포 올레매일시장 횟집을 찾아 나섰다. 수 년 전 들렀던 횟집의 기억을 더듬으며 시장 구석구석을 돈다. '월요일 맞아?' 그야말로 시장 바닥. 그래, 시장은 사람이 북적대야 제 맛이지. 이래저래 돌고 돌아 기막히게 그 집을 찾아냈다! 우정회센터 2호점(제주 서귀포시 중앙로54번길 38). 그때보다 장사가 더 잘 되는 듯. 냉큼 들어가서 중(中)자 한 판을 시켰다. 사장님이 갈치 회까지 맛보기로 서비스 준다고 했다. 콜~. 마흔 후반에 갈치 회를 첨 맛보겠네.

이윽고 한 상 푸짐하게 나온다. 신선했다. 쫄깃쫄깃, 부드럽게 넘어간다. '이게 회냐 인절미냐...' 횟감이 떡처럼 씹힌다는 건 그동안 회가 결핍됐다는 증상.^^ 잘 먹고 있는데 이사 친구가 가방에서 뭘 꺼낸다. 동해산 쥐포! 여기까지 회사 직원에게 선물 받은 쥐포를 챙겨 온 친구. 얘는 종종 친구들에게 쥐포를 맛보게 해 줬다. 가스불에 아주 잘 굽는다. 친절한 이모님께 바로 부탁. "가스불 좀 빌릴게요!" 망설이던 이모님이 흔쾌히 부르스타를 제공하셨다. 두 개를 굽고 있는데 사장님께 걸려 버렸다.

"이러시면 안돼요. 이 연기 좀 봐... 여기 누가 불 갖다 드렸어?"

부리나케 반납. 친구 왈.

"그럴 거 같더라. 그래도 두 개 구었네.^^ 한 개 더 구우면 불 갖다 준 이모 드릴까 했는데...."

영업집에서 매운탕이 아닌 음식에 불 피우면 안되는지... (ㅋㅇㅋ) 철부지 아재들~.

배가 부를 즈음, 처음으로 은빛을 마구 뿜어내는 갈치 회를 한 점 물었다. 꼬독꼬독, 담백했다. '음...' 내 입맛에는 갈치는 회보다는 조림이 맞다.

허리띠를 개방한 상태로 횟집을 나왔다. 어느새 밤 9시. 꿈만 같던 여행 첫날이 저물었다. 내일은 비가 예보돼 있어서 오늘 정말 최선을 다해 먹고 놀았다. 그래선지 좀 피곤. 숙소인 아트스테이 서귀포 하버(서귀포시 태평로 436)에 들자마자 침대로 다이빙. (아트스테이 서귀포 하버는 4성급의 작은 호텔로 깔끔했다. 특히 발렛 파킹과 조식 제공이 맘에 들었다. 옥상에 있는 야외 스파를 이용하지 못했다는게 좀 아쉬움으로 남는다) 

추리닝으로 갈아 입고 샤워를 한 후 횟집에서 어렵게 구운 튼실한 쥐포를 입에 넣었다. 커피도 한 잔 하며. 환스는 아직도 전화할 일이 있나 보다. 회사일이 끝났다 싶었더니 이제는 스터디 카페 일 모드다. 아직도 자동문 개폐에 문제가 있는 듯. 무인 카페다 보니 전산으로 진행되는데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서울에 있었으면 바로 가서 처리할 수 있었을 문제. 꼭 제주까지 오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르하임스터디카페라는 체인점을 운영하는 친구는 초창기 3개월엔 새벽 3, 4시에도 이용 학생들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자신도 시스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고생이 막급했다는 것. 이용객은 대부분 취준생들. 주택가가 밀집해 있는 역세권이라 잘 되는 편에 속한다. 그 고생을 하는데 잘 안되면 워쩌? 이렇게 치열하게 투잡을 해야 할 나이인데... 나는 뭐 하고 있나?

아재 셋, 신발 셋

어느새 다들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그리고 아재들의 수다가 시작됐다. 곧 봇물이 터졌다! 웬만한 아줌마들 만큼 주절주절 이바구를 턴다. 이야기는 새벽 3시를 넘어 계속됐다. 술이 없이도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아까 카페에서처럼, 교회 얘기를 시작으로, 자식 얘기, 직장 얘기, 진로 얘기, 노화 얘기가 이어졌다. 특히 노화, 늙는 얘기는 실존의 문제였다. 분위기, 목소리, 패션도 어느 정도 그대로인데 확실히 늙어버렸다. 목사 친구는 바람에 휘날리던 그 머리가 꽤나 빠졌고 배도 많이 나왔다. 영업이사 친구는 배는 크게 안 나왔는데 눈웃음치던 눈꼬리에 주름이 많이 잡혔다. 늘 쓰고 있는 야구모자의 귀 쪽에 흰머리 몇 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친구들도 예전의 나를 기억하며 노화된(!) 돈스를 더듬어 봤겠지... 바람이 그리 많이 쐬고 싶었다는 목사 친구는 표정이 어느새 얼굴이 '쾌청'해 있었다. 제주바람이 직효였다. 사람을 가까이하고 보살펴야 하는 목회자라는 직업. 사람에 웃고 울어야 하는 힘겨움을 제주 바람에 게워낸 듯했다.

"이제 자자. 벌써 4시여~"

친구가 구운 쥐포와 함께 건네준 황제천용단 덕인지 여독을 이기고 5시간의 마라톤 수다를 완주했다. 힐링이 별건가? 맘 편한 사람들과 만나 좋은 곳에서 바람 쐬고 맛난 거 먹고 아무 말 잔치를 가지면 되는 거다. 그날 밤 우리 셋은 부른 배만큼이나 잔뜩 불러 오른 기분을 안고 단잠에 들었다.

새벽에 들려오는 친구들의 고즈넉한 코골이. 신기하게 짜증 하나 안 나고 들을만하네!


둘째 날

늦게 잤는데 눈이 일찍 떠졌다. 제주 효과다. 좋은 데서 잠만 잘 수는 없는 일. 친구들은 아기처럼 쌔근쌔근 잘 자고 있다. 살살 옷 챙겨 입고 바닷가 쪽으로 나왔다. 이중섭 화가가 아들 둘과 갯벌에서 게를 잡곤 했다는 그곳을 휘휘 걸었다. 제법 센 바람에 빗방울이 날아왔지만 그래도 좋다. 제주니까.^^

이중섭 화백이 아들 둘과 게를 잡곤 했던 자구리해변. 얼마나 이곳이 좋았으면 아들을 그리워하며 그림으로 남겼을까.

하늘을 보니 비는 많이 안 올 거 같아 안심이 되었다. 목사 친구는 우리가 제주에 달랑 이틀 있는데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고는 아쉬워 했었다.

거친 바다 풍경을 보는 동안 내 귀엔 'A Chloris'(R. Hahn)의 오보에 연주가 흐르고 있었다. 눈으로는 격한 바다의 파도를 보면서 귀로는 샘물처럼 고요하게 흐르는 음색에 취한다. '아, 이 절묘한 대비.' 이때 음악이 주는 선율의 감동은 가히 몇 배가 된다. (듣기: 'A Chloris')

음악에 젖어 흐느적거리면서 숙소로 향한다. 친구들은 일어나 이미 씻고 있었다. 산책하며 찍어 보낸 사진 카톡 덕에 다들 깼나. 조식을 먹기 위해 호텔 식당으로 향한다. "어, 괜찮네?" 호텔 조식을 꼭 먹자고 했던 목사 친구가 신중하게 예약한 호텔이었다. 여유 있게 조식을 먹으면서 일정을 짜 본다. 그래 봐야 가이드는 나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장소 얘기를 한다.

"알았어. 나만 따라와. 일단 아침이니까 남쪽 바다 한 번 제대로 보자고."

그래서 선택한 곳은 숙소에서 10분 거리의 외돌개(서귀포시 서흥동 791)선녀탕이었다. 선녀탕은 자연 수영장으로 여름엔 인파로 북적이는 명소다. 외돌개는 너무 유명한 곳이고. 그런데 친구 둘은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그리 자주 제주에 왔을 텐데도 여기는 쏙 빼먹었던 게다.

"어디, 돈스 한 번 더 믿어보자."

금세 도착. 주차비 2000원 내고 하차. "자, 따라와."

일기예보엔 비 올 상황인데, 해가 쨍- 하고 떴다. 기분도 떴다. 7분쯤 걸어내려 외돌개로 안내했다. 반응은 폭발적!

"와우, 대박~! 이런 데가 있었어?!“

친구의 최신 아이폰이 모처럼 나의 최애 사진을 선사해 줬다. 먹구름 사이로 옅게 내려오는 햇빛을 담아냈다.

여세를 몰아 산책로를 지나 바다가 더 잘 보이는 너른 곳으로 향했다. 역시 감탄 연발. 바다는 물론, 나무도, 풀도 아주 제주스럽다는 게 친구들의 평이었다. 이제야 제주에 온 느낌이 팍팍 든다나. (그럼 어제는?)

외돌개 산책로에는 해변에서 보는 바닷가와는 다른 절경이 펼쳐진다. 제주 특유의 주상절리도 여럿 볼 수 있다. 보슬비가 안 왔다면 상당히 오래 더 머물렀을 곳이다. 그래서 선녀탕도 멀찍이서만 보고 차에 올랐다.

바다는 실컷 봤으니 이번엔 제주 안쪽으로 들어가서 말 목장을 보고 싶었다. 아프리카 분위기로 유명한 삼다수목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물안개가 너무 껴서 그 너른 목장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이곳은 말을 주로 탈 수 있게 하는 목장이다. "오신 김에 타고 가시죠?" (비 오는데...) 여 사장님의 권유를 뒤로하고 차를 뺐다.

본의 아니게 가이드의 추천 경로 하나가 실패했다. 만회 필요. 친구의 요청을 수용해 섭지코지로 향했다. 나 또한 오랜만에 가보고픈 곳이었다. 딱 10년 전 회사일로 왔던. 당시 드라마 '올인'으로 급부상한 곳이어서 많은 이들이 찾아갔다. 내 기억에 드라마 세트의 일부였던 성당과 바다 풍경이 기가 막혔다.

가는 길에 유독 버스와 차가 많아 속도를 줄였다. '엉, 유채밭이네?' 도로변 우측에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젊은 아가씨들이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나이는 먹었지만, 여전히 소년스런 우리.

아재들도 당근 찍어야지! 차를 대고 1인당 1,000원씩 내고 입장. 제주도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인 유채꽃 앞에서 열심히 폼 잡고 찍었다. 12월 한 겨울에, 유채꽃이 이리 많이 피었다니. 잠시나마 봄의 나라를 다녀온 듯 했다.

다시 제주의 중앙을 달렸다. 역시 아름다운 숲길. 시골길을 지난다. 요리조리 달리는데 이사 친구가 한 마디.

"엉, 저기가 어디지? 한 번 가보자."

시골 도로변에 외딴섬처럼 서 있는 예쁜 건물이었다. 분위기 좋은 마카롱 숍 '돌카롱'(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854). 나도 처음이었는데 느낌이 괜찮았다. 안개가 낀 탓에 신비한 기분마저드는 곳이었다. 이 집 마카롱은 보통 마카롱과 달리 좀 더 특이했다. 모양, 디자인도 그랬지만 씹히는 느낌이 쫄깃하고 쫀득했다. 그러면서 입에 부드럽게 감겼다.

"오~" 아재 셋이 이렇게 마카롱을 신나게 먹게 되다니. 두 개까지 먹고 나니 단맛이 혀에 요동쳤다. 딸을 둔 친구들은 일제히 돌카롱을 구매하더라. 한 상자에 15,000원씩. 꽤 비싼 편이었지만, 독특한 맛과 색감 탓인지 아주 잘 팔렸다. 돌카롱 건물은 외관도 멋있지만, 너른 마당과 옆의 노란 밭도 멋들어졌다. 아이폰 11을 갖고 있는 환스를 데불고 이름 모를 노란 밭으로 갔다. 안개가 끼니 더 아름다운 밭. 돌카롱의 노란 크림 과도 같다. 밭에서 둘은 점프를 연거푸 해가며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또다시 배에서 알람이. 단 걸 많이 먹어서 그런가?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집단으로 걸신이 들렸나..)

"저녁에 흑돼지 먹어야 하니까 간단히 뭐 좀 먹고 갈까?"
"좋지. 그러자."

가다 보니 산굼부리 인근이었다. "오!" 이곳에는 제주에 올 때마다 가는 중국집이 있다.

"중국집 어때?"
"콜~"

중국식당 간이역은 신굼부리 입구 앞에 있는 유일한 상가면서 식당이다. 좌우에 아무것도 없다. 마치 간이역 같다. 도착해 보니 간판명이 바뀌었네? '산굼부리반점'(제주시 비자림로 787)으로. 예전 간이역이 더 친근하고 좋았는데... 차에서 내리는데 침이 살짝 고인다. 이 집 볶음밥이 참 맛있다. 친구들은 짜장과 짬뽕을 시켰다. 사장님이 호쾌하게 서빙을 하신다. 식당 이름을 바꿔서인가? 꽤나 출출했던 우리는 음식이 나오자마자 바로 흡입했다.

말린 감귤에 폴라로이드 사진까지. 사장님의 서비스는 남달랐다.

식사 후 사장님은 귤도 담아 주시고 폴라로이드 사진도 직접 찍어 주시는 등 팬서비스가 이어졌다. 사진은 셋 중 가장 멀리 떨어져 사는 영업이사 환스에게 줬다. 나머지 하나는 식당 한편의 사진 게시판에 붙여둔다고 했다. 언젠가 다시 제주를 찾아 간이역에 와서 그 사진을 본다면, 이때의 기분 좋은 순간과 우리의 지금 젊음(?)을 그리워하겠지.

이제 마지막 관광지인 섭지코(서귀포시 성산읍 섭지코지로 107)에 닿았다.

"어, 그때와 많이 다른데?"

섭지코지의 자연은 변함이 없었다. 허나 등대까지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성당 건물이 출입금지 처리가 돼 애매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벌써 늦은 오후. 친구들은 마지막 관광지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연신 스마트폰 카메라를 눌러댔다. 찍고 우리 단톡방에 올리고 또 찍고...

그리 돌아다녔는데도 배가 꺼지질 않았다. 원래 목표는 이른 저녁으로 흑돼지를 포식하는 거였는데. 전혀 불가능한 소화 상태였다. 간단한 식사 차원에서 동쪽 위로 올라가 함덕해수욕장의 카페 델문도(Cafe'Delmoondo 제주시 조천읍 조함해안로 519-10 1층)로 향했다.

카페 델문도는 제주도에서 가장 바다에 닿아 있는 거의 유일한 해변의 베이커리 카페다. 그래서 평일에도 손님이 엄청 많다. 카페 분위기도 최상급이다. 야경이 특히나 아름답다.

바다를 직관할 수 있는 전망뿐 아니라, 야외 테이블 또한 제대로 구비돼 있다. 또 차를 마시다가 더 바다 쪽으로 나가 볼 수 있는 진입로도 마련돼 있다. 그만큼 카페 델문도는 커피만큼 바다를 지척에서 느낄 수 있는 카페다.

아재 셋의 실질적인 마지막 제주 만찬이었다. 커피와 음료, 빵 몇 개. 점점 짙어지는 어둠만큼 아재들의 아쉬움도 짙어졌다.

"하루 더 있다 가자~."

모두 알고 있다. 그냥 해보는 소리란 걸. 같이 왔으면 같이 올라가야지.

제주 여행을 통해 우리 사이에 있었던 긴 쉼표의 간극이 많이 채워진 기분이었다. 30여 년 전에 비해 환경이 바뀌고 여건과 외모도 조금 달라졌지만, 친구들은 그때처럼 지금이나 똑같았다. 나도 그렇게 보였겠지?

획 떠났다가 휙 돌아오는 여행. 둘 다 가볍기만 했다. 짧은 여행이 참 유쾌했다는 증거겠지.

"우리 다음에 또 오자. 내년에. 어떠냐?"

내년 이맘때 다시 제주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아재 셋 여행지가 바뀌게 될까? 아무튼 다음 여행의 우선 미션은 '흑돼지고기' 먹기다.

다시 여행으로 뭉친 날, 우리는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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